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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 <오직 두 사람> 독서일기

by 신레몬 2023. 2. 15.

2017년 문학동네 에서 출판된 김영하 작가의 단편집 <오직 두 사람>을 읽고 쓴 독서일기입니다.

책을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책을 읽고 쓴 독후감이기에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를 마구 포함하고 있는 점 감안해 주세요! 

 

<오직 두 사람>
소수민족의 언어 상실을 소재로 한 것이 저번에 읽은 김애란 작가의 <침묵의 미래>를 생각나게 했다. <침묵의 미래>가 타인과 연결되고 소통해야만 하는 인간의 근원적 외로움에 대해 다루었다면, <오직 두 사람>은 조금 결이 다른 느낌이다. 주인공 현주는, 자신과 아빠와의 관계를 뉴욕에 남겨진, 단 두 사람의 마지막 언어 사용자에 비유하려 한다. 나와 아빠와의 관계는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고유한 방식이 있어,라고 믿으며 굳이 그 관계에 대해 더 깊게 해석하지 않으려고 한다. 마치 언어를 아는 사람이 없어 번역자도 구할 수 없는 것 마냥. 하지만 학원에서 만난 후배가 자신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그니깐 현주와 아빠와의 관계를 타인이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을 들었을 때, 현주는 더없는 불쾌감을 느낀다. 마치 운명처럼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도 의문시해 본 적 없는 그 관계의 본질이 사실은 초라한 것이라는 것을 명징하게 깨달았을 때, 그때 이미 현주에겐 아빠는 죽은 존재였을 것 같다. 작품을 읽으면서 뭔가 찝찝함이 느껴졌는데, 현주의 이야기가 인생의 본질인 것만 같이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살아갈 때는 내 이야기를 모르다가,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르고 나서야 혹은 타인의 입에서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나에 대해 깨닫는, 불쾌한 무지. 소설을 읽고 기분이 이상하다.

<아이를 찾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엄청 충격 받았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읽었던 모든 이야기는 목표를 이루려는 주인공, 희망을 가지는 주인공만을 말했었고 오래도록 바라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그 후를 알려준 이야기는 단 한 개도 없었다. 작가의 말에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을 읽고 많이 울었었는데, 이게 이 소설의 주제를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아이만 찾으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오히려 모든 건 빠른 속도로 망가져만 간다. 그럼에도 주인공은 벗어날 수 없다. 그 상황을 견디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 일 년 전엔 이런 사실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해서 울었는데, 지금 보니깐 오히려 담담한 느낌이 든다. 나도 어떤 일에서 ‘그 이후’를 살아간다고 느꼈을 때 작가의 말이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되었고, 이제는 그다지 잔인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견뎌내는 삶도 삶인지라, 아무것도 싹트지 않는 황폐한 땅이 아니다. 아이를 찾습니다의 결말에서 주인공의 눈을 보며 깜빡거리는 아이가 버려졌다고 해서 생명이 아닌 게 아니듯이, 절망 속에서도 삶은 움트고 또 지난한 시간들을 보내게 된다.

<인생의 원점>
서진은 인생의 원점을 원했다. 나 돌아갈래~!라고 부르짖는 영화의 주인공을 보며 그는 묘한 질투를 느끼곤 했다. 저 사람은 돌아갈 원점이라도 있지. 서진은 특별할 것 없고 별 볼 일 없는 그의 인생을 살았다. 단지 조금 특별한 기억이라 하면 그가 초등학교 때 인아를 만난 기억이었다. 감정이 생크림이라면 인아를 만났을 때의 감정은, 누가 주걱으로 그것을 묵직하게 휘젓는 느낌이었다고 서진은 말했다. 서진은 별 볼일 없는 자신의 인생에 가치를 부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신도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인생의 원점’, 그니깐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 있길 바랐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내 양말과 운동화가 축축해지고 운수가 된통 꼬이는 기분 나쁜 날에도, 물리적 고통을 넘어 감정이 으스러질 것만 같은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날에도,
그때, 그곳은 참 좋았더랬지! 나에게도 그런 아름다운 기억이 있더랬지! 하며 자기위로할 그런 원점 말이다. 서진은 인아를 딱히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를 좋아하고 아끼긴 했지만 그에게 그녀가 인생의 다신 안 찾아올 운명적인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란 건 서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진은 인생의 원점이 필요했다. 내 가난한 정신에 영원한 풍요를 가져다줄 그런 고귀한 동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인아를 사랑하는 척했고 인아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하지만 그는 인아를 그의 폭력적인 남편으로부터 보호해줄 만큼 사랑하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까지 비겁하고 현실적으로 자신의 안위를 택했다. 그가 인아에게서 찾은 인생의 원점은 그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막상 그에게 인아가 정말 그의 인생의 원점이 될 기회가 찾아왔을 때, 현실의 법으로도 도덕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지만 그의 정신만은 영원히 돌아올 수 있을 그런 값진 회귀점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서진은 그걸 뻥 찼다. 왜? 그는 대개의 소설에서 말하는 양심과 도덕 그리고 모든 당위성의 경계를 초월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아를 비겁하게 사랑했다. 현실적으로 사랑했다. 소설의 주인공이 아닌 법과 도덕에 지배받는 한 개인으로서 사랑했다. 사랑하는 여자와의 달콤한 도피를 위해 그녀의 폭력적인 남편을 처치하고 몇 년간의 수감 생활과 온갖 수모를 견디고도 사랑할 용기는 그에게 없었다. 그녀를 그만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그는 여느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현실적으로 자신의 안위만을 보존하며 살았더니 되려 그것이 그에게 인생의 원점을 가져다주었다. 지금 바로 여기 이 순간 서진은 소위 말하는 “정상”의 범위에서, 감옥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범죄자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참여자가 아닌 방관자로서 자기 한 몸 그리고 정신을 비겁하게 보존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한 수식어가 비겁이어도 어쨌든 그는 살아 있었다. 그걸로 된 거였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이 그에겐 인생의 원점이었다. 어떤 고귀한 정신적 사치가 아니라 뜬구름에서 내려와 흙을 밟으며 살고 있는 것이 미친 듯이 좋아 죽겠을 때, 그때가 서진의 인생의 원점이었다.

일 년 전에는 인생의 원점을 읽고 이렇게 후기를 썼는데, 이번에 다시 읽고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이때는 물리적으로 살아 숨 쉬고 삶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인생이고, 인생은 별 거 없고, 그래서 서진이 사는 인생도 고깝진 않지만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읽으니 서진은 살아 있지만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인생의 원점은 인생의 종점이다. 아니, 어쩌면 인생의 원점은 존재하지 않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종점이나 원점이나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서진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위해 살지 않았고 언제나 현실적인 생존에나 급급하며 살아갔다. 인간의 인생은 매우 짧다. 길어야 백 년 언저리일 텐데, 그동안 목숨이나 겨우 부지하며 사랑하는 것도 없이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여하튼, 그래서 서진이 마지막에 인아의 남편에게—나는 서진이 인아의 가정폭력을 방관했다는 점에서 인아의 남편만큼 서진이 나쁘다고 생각한다—마치 자신이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것처럼 욕을 지껄이고 나와 자신이 살아있음에 뛸 듯이 기뻐할 때 역겨움을 느꼈다.

<옥수수와 나>
너무 난해해서 내 해석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2~7까지의 화자는 자신을 옥수수라고 생각하고 주위 사람들을 자신을 잡아먹을 닭이라고 인식하는, 비이성적인 사고에 사로잡힌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이다. 따라서 이야기에 일어난 일들도 우리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정신 착란에 사로잡힌 이런 화자가 1에 나오는 환자라는 것이 나의 해석이다. 여기서 나오는 화자는 작가의 페르소나이고, 작가는 이 건방지고 자의식 과잉의, 망상증적인 화자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이 평소에 소설이나 철학 등에 대해 생각했던 것들을 마음껏 발화할 수 있는 것이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화자이기 때문에, 작가는 무슨 말을 해도 면죄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부족한 화자의 탓으로 돌리면 되니깐. 사실 이 소설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정말 모르겠어서 쥐어짠 해석이다.

<슈트>
이 작품은 믿음과 의심에 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의 사정을 들고 ‘나’를 찾아온 지훈의 이야기는, 오로지 지훈의 입을 통해서만 전해진다. 아내는 지훈의 이야기 중 어머니의 남자관계에 대한 부분은 불쾌해하는 등 어떤 부분은 받아들이고 어떤 부분은 받아들인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나’도, 지훈의 이야기를 전해 듣긴 하지만 완전하지 않은 그의 이야기에 대해서 듣다가, 마지막엔 의심으로 끝난다. 아내도 마찬가지라, 지훈의 이야기가 어딘가 거짓이 가미된 부분이 있다고 보아 그런 ‘불신’의 찝찝함을 없애려고 지훈이 떠난 날 열심히 대청소를 한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의 이야기를 그 사람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고, 완전하게 진실을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래서 어디까지 믿을지 또는 믿지 않을지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청자에게 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는 진실을 발견하려고 하기보단 듣기 싫은 이야기는 아예 믿지 않아 버리는 것으로, 그래서 그냥 무시해 버리는 것으로 대체해버리려고 한다. 아마 이 작품은 이런 사람들의 태도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닐까.

<최은지와 박인수>
주인공은 정작 본인은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주위 사람들의 행동으로 많은 것을 잃는다. 가령, 최은지의 다소 황당한 임신 이야기는 주인공을 둘러싼 루머를 촉발하고, 많은 직원들의 신뢰와 결정적으로 아내와의 관계를 잃게 된다. 또한, 주인공의 친구 박인수는 몸이 아파 투병을 하다가 주인공을 떠나게 된다. 그 상황들에서 주인공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주인공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할 것을 했지만 상황은 나쁘게만 흘러간다. 최은지와의 관계에 대해서 해명하면 더 우스워지기만 할 것이고, 아무도 그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그런 루머들을 견디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시간이 지나서 마르길 기다릴 수밖에. 박인수에 대해서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정기적으로 병문안을 가는 것 정도밖에 없다. 주인공은 박인수에게 생명을 줄 수도,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도 없다. 그렇게 인생은 때로는 우리에게 관망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할 수 없는 상황들을 많이 주는 것 같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영화 <메기>에 나온 대사가 생각났다. “우리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해야 할 일은 구덩이를 더 파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얼른 빠져나오는 것이다.” 힘든 일이 닥쳤을 때 그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더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할 수 있는 대로 덤덤하게 빠져나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인생에서 고난을 겪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신의 선물>
이 작품에 나오는 네 인물은 각기 이 괴랄한 ‘방 탈출 게임’을 다른 방식으로 견딘다. 정은은 우울해하며 현실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으로, 수진은 신에게 속죄하는 것으로, 강재는 끊임없이 자신의 몸으로 부딪히는 것으로, 태준은 희망을 놓지 않고 끝없이 해결책을 찾아나서는 것으로. 어느 정도 현실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한다. 마치 우리 인생은 이런 방 탈출 게임처럼, 누가 우리를 이곳에 놓았는지도 모르게 세상에 던져진다. 질문하고 싶어도 그 질문을 받아줄 존재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답을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 그 상황에서 순응하고 버티든지, 이 상황의 의미가 무엇인지 끝없이 묻든지, 아니면 끝없이 희망을 가지던지. 네 명의 방식 모두 근원적으로 이해할 수도 질문할 수도 없는 현실에 대해 각자만의 스타일로 견디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방식이 더 좋다 나쁘다 과연 우리가 비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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